간만에 참 재미나게 읽은 기사입니다.
심리학을 전공한 쥔장의 백그라운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주제에 관심이 많아서 심리학을 선택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
그나저나 의대 교수님이 글도 잘 잘 쓰시네요. 구절구절 재미나게 읽고 많은 통찰을 얻어갑니다. 마지막에 전면급식 논쟁구도와 연결까지 시킨 부분에서는 감탄까지 나오더군요. 볼 가능성은 없지만 강신익 교수님께 감사 인사도 남겨봅니다.
과학이 정치에 주는 충고
[사이언스 온] 현실 정치 지형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인지과학…
진보·보수의 상이한 은유 구조가 동일 사안을 다르게 인식하게 해
“함께 활성화된 신경세포는 서로 연결된다”(Fire together, wire together). 서로 다른 사건이나 기억이 동시에 경험되고 그것이 반복되거나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면 각각을 관장하는 신경세포들이 서로 연결돼 하나의 경험구조가 된다는 신경과학의 가설이다. 가령 9·11 테러같이 큰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해보라.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를 생각해도 좋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가 당시 누구와 함께 있었고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를 어렵지 않게 기억해낼 것이다. 하지만 그 사건이 일어난 해가 언제인지를 기억하려고 하면 금세 난감해진다. 우리가 신문 기사나 역사책에 기록되는 방식으로 사건을 경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두드러진 사건과 함께했던 경험은 무의식에 기록돼 삶의 지표가 되는데, 이는 추상화해 의식에 떠올리는 개념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우리 삶을 지배한다. 가령 어려서부터 학대를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공포와 증오의 회로가 과도하게 활성화되는데, 그 경험이 반복되면서 뇌의 물리적 구조마저 그렇게 굳어진다. 이 구조는 학대의 순간과 유사한 상황이 도래할 때마다 다시 활성화돼 공격적 행동을 유발한다.
(원문에는 이미지 있습니다.)
» 지난해 12월28일 <가디언>의 보도에 따르면, 영국 런던대학 학생 90명을 대상으로 뇌를 스캔했더니 정치적 성향에 따라 뇌의 특정 부분이 발달해 있었다. 사진은 서울 강남 세브란스병원 영상의학과 정태섭 박사의 엑스레이 포토 작품, <지혜의 산실>.한겨레 자료
합리적 판단보다 강력한 정서적 경험
반복되는 학대로 몹시 공격적으로 변한 개를 치유하는 장면을 담은 TV 프로그램은 이 가설이 단순한 가설 이상임을 시사한다. 학대로 인한 공포와 보호 본능으로 인한 공격성의 연결고리를 끊고 그 자리를 따뜻한 보살핌으로 대체하는 것인데, 이 역시 건강과 행복에는 정서적 경험이 합리적 판단보다 우선함을 말해준다.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이것이 바로 은유적 사유의 신경학적 기초라고 말한다. 우리는 물리적 실체가 없는 시간을 ‘날아가는 화살’이나 ‘흐르는 물’이라는 실체를 통해 이해하는데, 이때 우리 뇌는 실제로 화살이나 물을 떠올린다. 앞에서 말한 ‘따뜻한 보살핌’도 그렇다. 보살핌은 대개 따뜻한 체온을 나누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므로 두 가지가 연결돼 뇌와 언어 속에 그렇게 구조화된 것이다.
인지언어학이 밝혀낸 사실들은 우리의 정치 지형을 이해하는 데도 유용하다. 레이코프는 <도덕, 정치를 말하다> 등의 저서에서 우리가 은유를 통해 구조화된 사유의 틀에 비춰 도덕과 정치를 바라본다고 주장한다. 진보와 보수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은유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사안을 다르게 인식한다는 것이다.
먼저 그는 우리가 도덕과 정치를 ‘가정’의 틀로 이해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국가는 곧 가정’이라는 은유다. 인류 진화의 전 과정을 통해 가정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 단위였고, 씨족·부족·국가·지구촌으로 단위가 확대되는 동안에도 여전히 기본적 단위로 남아 있다. 따라서 확대된 삶의 단위(국가)를 가정이라는 체화된 경험의 속성에 빗대 이해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다.
문제는 가정과 그 우두머리의 기본 속성을 무엇으로 보느냐다. 레이코프에 따르면 ‘엄한 아버지’와 복종하는 가솔을 강조하는 생각의 틀은 보수가 되고, 자녀와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자애로운 부모’의 역할을 강조하는 생각의 틀은 진보가 된다. 엄한 아버지는 치열한 경쟁을 통해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살리는 대신 절대적 권위를 누리며, 자식들 역시 스스로 경쟁에서 살아남도록 교육한다. 이 틀에 따르면 세상은 약육강식의 각축장이고, 교육은 경쟁에서 이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뇌 구조 달라
복지를 포퓰리즘이라고 비하하는 대통령과 전면 급식을 예산 낭비라고 우기는 서울시장이 가졌을 법한 생각들이다. 이들에게 복지는 경쟁 의지를 꺾는 독약이며, 전면 급식은 의존적 성품을 기르는 잘못된 교육이다. 이들은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면 자연히 자식에게도 그 혜택이 돌아간다는 경험적 사실을, 부자의 세금을 깎아주어 돈을 더 벌게 해주면 그 돈이 가난한 사람에게도 흘러들어간다고 확대해석한다. 논리로나 경제학 지식으로나 근거 없는 해석이지만(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보라), 엄한 아버지 은유를 받아들인 대중의 무의식은 별 거부감을 느끼지 못한다.
자애로운 부모 은유에서는 경쟁에서 살아남는 능력보다는 자녀(국민)의 건강과 행복이 우선이다. 여기서는 공감(empathy)과 책무(responsibility)라는 가치가 중심이다. 경쟁보다는 소통과 연대를 소중히 여기며 사회적 소수자를 관용과 배려로 대하려 한다. 물론 이 은유를 받아들인다고 모두 천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사회 현실이 경쟁의 가치를 과소평가할 만큼 아름답기만 한 것도 아니다. 인류 문명사를 보더라도 대부분의 시기는 소수에 의한 지배가 당연시됐다. 소수인종과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역사도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문명이 경쟁과 힘의 지배에서 공감과 협동의 방향으로 진화해왔고 그 추세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주장이 동조를 얻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제러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는 인류 문명이 경쟁을 넘어 공감의 구조를 확대해온 역사였음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엄한 아버지 은유는 경쟁과 힘의 논리를, 자애로운 부모 은유는 공감과 책무의 가치를 무겁게 여기는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다.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그 둘을 조화시킬 수도 있지만, 우리의 본능과 무의식은 주로 한쪽 방향에 치우치게 돼 보수와 진보가 된다.
얼마 전에는 이 가설을 뒷받침할 과학적 증거가 제시되기도 했다. 지난해 12월28일 <가디언>의 보도에 따르면 스스로를 보수 또는 진보라고 밝힌 영국 런던대학 학생 90명을 대상으로 뇌를 스캔했더니 보수 성향의 학생은 편도체가, 진보 성향의 학생은 전측 대상회 부분이 두꺼운 경향이 뚜렷했다고 한다. 편도체가 주로 공포를 담당하는 부위고 전측 대상회는 외부 정보의 수용과 학습을 담당하므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보수는 생존의 일차적 조건에 민감하다. 그들에게 발달된 편도체는 맹수나 이웃 집단의 공격 또는 자연재해 같은 위험이 만연한 시기에 진화했다. 낯선 상황에는 일단 공포를 느껴 도망가거나 증오를 불태워 맞서 싸우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공포정치 체제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아직도 군대 같은 조직에서는 필요한 속성이다.
진보는 변화하는 환경에 더 민감하다. 주어진 조건에 반사적으로 반응해 방어와 공격의 날을 세우기보다는 탐색을 통해 그 조건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려 한다. 전측 대상회가 바로 그런 기능을 담당하는 부위다. 외부 정보를 받아들이고 환경에서 무언가 배우려면 먼저 자신이 수용적이어야 하지만, 일단 학습이 끝난 다음에는 그 환경을 바꾸려 한다. 그래서 그들은 호기심이 많지만 주어진 조건에 불만도 많다.
현실 세계의 보수와 진보가 이렇게 뚜렷이 구분되지는 않는다. 두 속성은 모두 인간의 생존과 번영에 필요하고 상호 배타적이기보다는 상보적일 수도 있다. 문제는 엄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부모의 은유 중 하나를 선택한 이후 그 은유를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써 다른 하나를 악마로 만든다는 것이다. 여야가 거의 모든 정책 사안에서 대립하는 이유다. 내가 선이면 상대는 악일 수밖에 없는 것이 도덕과 정치, 그리고 인지구조의 속성인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양비론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과 추종하는 것은 다르다.
‘무상’보다 ‘전면’ 급식으로
도덕과 정치를 인지과학으로 이해하고 논쟁에서 이기려면 먼저 논쟁의 구도를 바꿔야 한다. 개별 정책의 효과에 대한 논쟁보다는 그 정책 속에 들어 있는 도덕의 프레임을 들춰내야 한다. 지금 진행되는 급식 논쟁에서 ‘무상’이란 말을 퇴출시켜야 한다. 그 말을 계속 쓰는 한 ‘전면’ 급식 옹호자들은 어느 순간 노력 없이 재물을 탐하는 파렴치한이 될 수도 있다. 모두 함께 나눈다는 ‘전면’이라는 공감의 구도가 있는데도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의 의도에 말려드는 것은 어리석지 않은가. 과학이 정치에 주는 충고다.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인문의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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